고려 여성의 가정에서의 역할

고려시대 여성의 역할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고려시대 여성이 관직을 갖거나 기타 사회활동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가정에서의 역할을 주로 살펴보게 되겠습니다. 가정 내에서 여성의 역할로 가장 중요한 것은 내조 -관리인 남편을 내조하는 것과 집안의 제사를 지내고, 집안의 살림을 도맡아 하고 그리고 자기 재산을 관리하는 정도의 일이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계속해서 염경애의 묘지명을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패주와 중원의 수령으로 나갔을 때는 산을 넘고 물을 건너는 어려움을 마다하지 않고 천리 길을 함께 갔고 내가 군사 일에 종사하는 동안에는 가난하고 추운 규방을 지키면서 여러 차례 군복을 지어 보내 주었다. 내가 내시에 참여하는 동안에는 있는 것 없는 것을 다 털어서 음식을 만들어 보내기도 하였으니 무릇 나를 좇아 어려움을 겪은 23년간의 일들은 다 적을 수가 없다. 우리 돌아가신 아버지를 섬기지 못하였으나 명절이나 복일과 납일이 되면 매번 몸소 제사를 드렸다. 또 길쌈을 해서 저고리 한 벌이나 바지 한 벌을 지어 제삿날이 될 때마다 영위를 모신 자리에 절하고 바쳤으며 재에 나아가 무리가 많든 적든 버선을 지어 중들에게 시주하였는데 이것이 가장 잊지 못할 일이다. " 가난한 관리의 아내로서 아주 어렵게 집안 살림을 이끌어나가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리고 최루백의 아버지 그러니까 염경애의 시아버지는 둘이 결혼하기 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직접 모시지는 못하였으나 이 시아버지의 제사를 빠짐없이 챙겨드렸고 이 제사는 불교와 관련이 있었다고 하는 사실을 이 대목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재를 지내면서 중들에게 버선을 지어 시주하였다'라고 하는 대목이 그것입니다. 아내의 이러한 역할에 대해서 남편은 대단히 고마워하고 있죠. 계속해서 읽어보겠습니다. “일찍이 내게 말하기를 '당신은 글 읽는 분이니 다른 일에 힘쓰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는 집안의 의복이나 식량을 주관하는 것이 맞는 일인데, 비록 힘써 구해도 마음 같지 않은 경우가 때때로 있습니다. 설사 불행하게도 뒷날 제가 천한 목숨을 거두게 되고, 당신은 후한 녹봉을 받아 모든 일이 뜻대로 되더라도 제가 재주 없었다고 하지 마시고 가난을 막던 일은 잊지 말아 주세요. '라고 하고는 크게 탄식을 하였다. ” 좀 이상한 대목이죠. 집안의 가난이 남편의 부족함 때문이 아니라 그 아내 때문이라고 하는 사실을 그 아내도 남편도 모두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집안의 살림은 여자가 하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이 이 밑바탕에 깔려있다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을축년 봄에 내가 사직으로부터 우정언 지제고로 자리를 옮기니 아내는 얼굴에 기쁜 빛을 띠면서 '우리의 가난이 가시려나 봅니다. '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나는 '간관은 녹이나 지키는 자리가 아니오. '라고 했다. 아내는 '어느 날 문득 당신이 궁전의 섬돌에 서서 천자와 더불어 옳고 그른 것을 쟁론하게 된다면, 비록 가시나무 비녀를 꽂고 무명치마를 입고 삼태기를 이고 살아가게 되더라도 달게 여길 것입니다. '라고 하였으니, 이는 평범한 부녀자의 말 같지 않았다. ” 뭔가 염경애라고 하는 여성이 유교적인 가치를 내면화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이런 고생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죠. 여기 남편을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남종 여부라고 하는 생각이 보이는 것이죠. 이것은 그 당시 사회의 분위기이기도 하겠지만 이런 사회 분위기를 교육을 통해서 배웠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과연 염경애는 저런 말을 어디서 배워서 한 것일까요?
고려시대 여성 교육기관
고려시대에는 교육기관이 서울과 지방에 있었지만 모두 남성들을 위한 교육기관이었고 여성들을 위한 교육기관은 따로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염경애가 유교적인 가치를 익히게 된 것은 집안에서 부모로부터의 교육을 통한 것일 겁니다. 여성들에 대한 특별한 교육기관은 없고 집에서 부모에게 공부를 하는 정도. 이 정도를 가지고 최소한의 유교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최루백이 승진을 했고 아내인 염경애는 승진했으니 월급이 오를 것이고 그래서 우리 살림이 좀 피려나보다 라고 하는 희망을 피력합니다. 이 승진을 통해서 얼마나 월급이 올랐을까요? 지금 분명히 확인할 수는 없지만 대략적인 추세는 추측할 수가 있습니다. 먼저 최루백이 승진했다는 우정언 지제고는 중서문하성 낭사의 종 6품 간관직으로 그 당시 청요직이라고 불리던 그래서 모두가 오르고 싶어 하던 관직입니다. 대단히 영광스러운 승진이죠. 지제고라고 하는 것은 왕명을 짓는 관직입니다. 이것도 역시 문장 솜씨를 인정받는 사람들이 오를 수 있는 관직이기 때문에 최루백의 우정언 지제고는 그 개인에게는 대단한 영광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고려시대 관리는 관직의 높이에 따라서 녹봉과 전시과 토지를 받게되는데 최루백이 승진한 우정언 지제고는 녹봉으로는 66석 10두를 받고 전시과에서는 전지 40 결과 시지 10 결을 받는 관직입니다. 이것이 승진하기 전 상태와 비교를 하면 녹봉은 63석 5두에서 5. 5 %가 인상이 되는 것이고 전시과에서는 전지의 경우 35 결에서 40 결로 14% 인상, 시지의 경우 8 결에서 10 결로 25% 인상이 되는 대단한 승진입니다. 이렇게 많은 월급이 올랐을 때 아내로서의 염경애는 당연히 기뻐했을 것입니다. 가난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분명히 가졌겠죠. 여기에 대해서 최루백은 '간관은 녹봉이나 축내는 자리가 아니오'라고 해서 자신은 그런 승진의 결과로 집안 살림이 좋아지는 결과는 기대하지도 않았다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이죠. 집안 살림에 전혀 관심이 없는 아주 청백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집안에는 과연 염경애의 재산과 최루백의 재산이 얼마씩이나 있었을까요? 우리는 그 두 사람의 재산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그 재산 가운데 최루백의 재산과 염경애의 재산이 분리되어 있었을 가능성만은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고려시대에 부부의 재산이 별도로 관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재산이 상속될 때 아들과 딸, 심지어는 결혼한 딸에 대해서도 동등하게 배분되어 상속되었다고 하는 고려시대의 상속 관행으로부터 유추한 사실입니다.
아들과 딸에게 똑같이 나누어져서 상속
고려시대에 토지와 노비 같은 중요한 재산이 아들과 딸에게 똑같이 나누어져서 상속되었다고 하는 사실은 이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고려 후기의 어떤 이야기입니다. “남매가 서로 송사를 벌였다. 동생이 말하기를 '어찌 누이만 부모의 재산을 갖고 동생에게는 그 재산을 나누어주지 않습니까?'라고 하니, 누이가 말하기를 '아버지가 임종 때 가산을 모두 내게 주셨다. 네게 남기신 것은 검은 옷과 검은 관, 미투리 한 켤레, 종이 한 묶음뿐이었다. 문서가 있는데 어찌 어겼겠는가?'라고 하였다. 손변이라고 하는 지방관이 두 사람을 불러 묻기를 '부친이 임종할 때 모친은 어디 있었느냐?'라고 하니, '먼저 돌아가셨습니다. '라고 하였다. '그때 너희 나이는 몇 살이었는가?'라고 하니, '누이는 이미 혼인을 했고, 동생은 아직 어렸습니다. '라고 하였다. 손변이 말하기를, '부모의 마음은 자식에 대해 같은 것인데, 어찌 혼인한 딸에게는 후하고 어미도 없는 어린 아들에게는 박하겠는가? 어린 동생이 의지할 데라곤 누이뿐인데, 만일 유산을 똑같이 주면 동생을 양육하는 것이 한결같지 않을까 걱정한 것일 따름이다. 아이가 장성해서 그 종이에 소장을 쓰고 검은 옷과 검은 관을 입고 미투리를 신고 관에 고하면 장차 판결해 줄 사람이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네 가지 물건을 남긴 뜻은 이와 같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남매가 깨달은 바 있어 서로 마주 보며 울었고, 손변은 재산을 반으로 나누어 주었다. ” 여기 보면 고려시대 아들과 딸이 재산을 똑같이 나누어 갖는 것이 관행이었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나 있습니다. 따라서 염경애와 최루백 부부도 자신들의 재산을 따로 관리했을 것입니다. 물론 염경애의 말대로 이 두 사람의 재산을 합쳐도 그리 넉넉하지는 않았던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각자 부모에게서 상속받은 재산을 따로 관리하게 되었을 때 둘 중에 어느 한 사람이 죽으면 그 재산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발생했을 것입니다. 부인이 죽으면 부인이 관리하던 부인의 재산은 자녀들에게 독립적으로 상속이 됩니다. 아들에게 상속하면서 이것은 어머니가 물려준 재산이라는 딱지가 붙는 거죠. 자녀가 없으면 여자의 집으로 되돌려집니다. 이렇게 하던 것이 점차 아내가 죽으면 남편이 그 재산을 갖는 쪽으로 변화하기 시작하는데 그럴 경우에도 남편이 재혼을 하게 되면 먼저 부인의 재산은 그 부인의 친정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지금 보아도 매우 합리적인 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재산의 상속은 제사에 대한 대가로 먼저 주어지는 것이죠. 아들과 딸에게 재산이 골고루 분배된다고 하는 것은 재산을 상속한 사람이 죽었을 때 그 사람에 대한 제사도 동등하게 지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고려시대에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적장자가 단독으로 제사를 지내는 것이 아니라 아들과 딸 -실제로는 사위가 되겠습니다만- 아들과 사위가 돌아가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이것을 그 당시 사료에서는 윤행 봉사라고 일컫습니다. 그만큼 가정 내에서 남성과 여성, 아들과 딸이 대등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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