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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역사, 고려, 한국사, 고려시대의 삶

고려 태조의 토성 나눠주기 정책

고려 태조의 토성 나눠주기 정책

고려 태조의 토성 나눠주기 정책
고려 태조의 토성 나눠주기 정책

고려 초의 지방 세력은 성씨를 어떻게 만들어서 사용했을까요? 자기들이 스스로 적당한 성씨를 만들어서 사용했을까요?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여기에는 고려 왕실이 지방 세력에게 회유책의 일환으로 성씨를 나눠주는 정책, 이것을 토성 분정이라고 합니다만, 이런 정책이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고려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한 다음에 통일 과정에서 공을 세운, 그러니까 자기를 도와준 호족들에게 여러 가지 정책을 펼쳤다고 하는 것은 이미 알려져 있는 사실입니다. 사심관 제도, 기인 제도, 그리고 유명한 결혼 정책, 또 왕 씨 성을 같이 사용하게 하는 사성 정책,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만, 특히 태조 23년(940년)에 세 가지 중요한 정책이 동시에 추진됩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우리가 전시과에 대해서 공부할 때 첫머리에 꼭 나오는 역 분전 제도입니다. 또 하나는 군현의 이름을 정하는 정책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가 토성을 나누어주는 토성 분정 정책입니다.

역 분전 지급

먼저 역 분전 지급에 대해서 살펴보면, '고려사' 식화지에 “통합할 때 조신과 군사에게 관계(官階)를 논하지 않고 성행(性行)의 선악과 공로의 대소를 보아 차등 있게 지급하였다. ” 토지를 성행의 선악, 공로의 대소, 이 두 가지 원칙만 가지고 지급했다는 것이죠. 이 주관적인 기준은 당연히 왕건의 입장에서 볼 때 자기에게 얼마나 협조했는가 하는 것을 지급의 기준으로 삼았을 것입니다. 두 번째로, 군현의 이름을 정하기입니다. 군현의 이름을 정할 때, 주·부·군·현·향·소·부곡 이런 등급이 있는데, 이 등급을 정해준 것입니다. 먼저 사료부터 확인하겠습니다. 지금의 충주는 “중원경이었던 것을 태조 23년에 충주라고 고쳤다.” 청주는 "서원경이던 것을 태조 23년에 청주라고 고쳤다. ” 양주는 "한양 군이던 것을 고려 초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 광주는 "한주이던 것을 고려 23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 이런 기록들이 있습니다. 이 네 개의 사례는 모두 무슨 '주(州)'가 된 것이죠. 주·부·군·현 하는 지방 행정단위의 여러 격 가운데 가장 높은 등급에 해당합니다. 이 이름을 정할 때 어디는 '주'가 되고, 어디는 '부'가 되고, 어디는 '부곡'이 됐을까요? 이것은 고려 왕실에 협조를 한 정도, 많이 협조를 한 큰 세력을 가진 호족이 있는 지역은 '주'로 그보다 못한 지역은 '부'로, '군', '현' 이렇게 차례로 아래로 내려갔을 겁니다. 울산에 이런 사례가 있습니다. “태조 때 이 고을 사람 박윤웅이 큰 공을 세웠으므로 하곡현, 동진현, 외풍현을 합쳐 흥례부를 만들었다. ” 박윤웅이라고 하는 이 지역 호족이 공을 세웠다는 것은 태조 왕건에게 공을 세운 것이죠. 그랬기 때문에 왕건은 박윤웅의 공을 기려서 인근의 현을 합쳐 흥례부라고 하는 것을 만든 겁니다. 이 흥례부가 뒤에 공화현으로 강등되었다가 다시 울주로 상승하는 이런 역사를 갖게 되는데요, 여기에 보면 확실히 공을 세운 호족의 근거지를 그 공에 걸맞은 행정구역 등급으로 삼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죠.

토성 분정 정책

그리고 마지막으로, 태조 23년 정책에 토성 분정이 있습니다. 성씨를 나누어준 것인데요, 안동 권 씨에 대해서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권 씨는 김행으로부터 시작하는 신라의 대성(大姓)이다. 김행은 복주(지금 안동)를 지켰는데 태조가 신라를 치려고 복주에 왔을 때 김행이 천명이 그에게 돌아가는 것을 알고 읍을 들어 항복하였다. 태조가 기뻐하여 권 씨라고 사성 –성을 주었다. ” 여기 보면 권 씨라고 하는 성은 태조 왕건이 자기에게 공을 세운 사람에게 준 성씨죠. 김행은 왕건으로부터 권 씨라는 성을 받아서 사용한 것입니다. 모두가 협력하진 않았을 테니까, 협력하지 않은 지역은 어떻게 했나 하는 궁금증이 생기죠. 충청도 목천현의 경우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속설에 전하기를, 고려 태조가 나라를 세운 뒤 목주 사람이 여러 번 배반한 것을 미워하여 그 고을 사람들에게 짐승 이름으로 성을 내렸는데 뒤에 소 우자 우(牛)씨는 우(于)씨로, 코끼리 상자를 받은 상(象)씨는 상(尙)씨로, 돼지 돈자를 받은 돈(豚)씨는 돈(頓)으로 고치고, 장(場)은 장(張)으로 고쳤다. ” 그러니까 태조는 목천의 호족들에게 소 우자, 코끼리 상자, 돼지 돈자, 이런 상스러운 성씨를 내려주었던 것입니다.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는 좋은 성씨를, 자기에게 방해를 한 사람에게는 나쁜 성씨를 내려주는 이런 차등 정책을 통해서 지방의 호족들에 대해서 논공행상을 실시한 것이죠. 이걸 보면 왕건은 요즘 말로 뒤끝이 있는 남자였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지역의 이름이 정해지고, 성씨가 주어지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어디 무슨 씨'라고 하는 것이 비로소 성립하게 되죠. 이렇게 해서 나누어준 성씨가 생각보다 굉장히 많습니다. 뒷날 '세종실록 지리지'라고 하는 조선 초의 자료에서 각 도별로 몇 개씩의 성씨가 주어졌는가 하는 것을 세어봤습니다. 그랬더니 이 씨가 경기도 지역에 23개, 충청도 지역에 28개 해서 모두 138개가 주어집니다. 다시 얘기해서 '어디 이 씨'라고 하는 것이 138개가 있었다는 얘기죠. 이런 식으로 김 씨는 106개, 박 씨는 85개, 그래서 총 3,964개의 본관 토성이 생깁니다. 한 군현에 하나씩의 성씨가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한 군현에 여러 개의 성씨가 주어집니다. 다시 얘기해서 한 군현에 여러 실력자가 있으면 각각 다른 성씨를 내려준 것이죠. 예를 들어서 충주의 경우에는 서, 석, 최, 유, 강, 양, 진, 안, 박 씨. 굉장히 여러 호족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죠. 전주에 전주 이 씨뿐 아니라 최, 유, 박, 전, 경, 한, 백 씨 이런 여러 성씨가 주어집니다. 그러면 충주 서 씨, 충주 석 씨, 충주 최 씨, 충주 유 씨 이런 식으로 본관이 생기게 되는 것이죠. 한 가지 유념해야 할 것은 그 지방 사람 모두에게 성씨를 내려준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데요. 충주에 살고 있는 사람 모두에게 성씨를 내려준 것이 아니라, 그 지역의 유력자들, 우리가 호족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성씨를 내려준 것입니다. 그러면 일반 민은 어떻게 될까요? 일반 민은 성씨는 없이 본관만을 갖게 됩니다. 일반 민인 '나'는 성씨는 없고 이름만 있고 본관은 어디, -예를 들어 충주- 이렇게 되는 것이죠.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성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그 사람들의 사회적 신분을 표시하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성이 있는 층과 성이 없는 층이 구별된 것이죠. 성이 있는 층을 가리키는 말이 백성(百姓)입니다. 백가지 성, 여러 가지 성, 이런 뜻이죠. 성이 있는 이 사람들은 그 지역 사회의 지배 신분이었을 것입니다. 성이 없는 사람들은 보통사람이라는 뜻의 백정(白丁)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고려의 일반 민이죠. 이런 점에서 성씨를 내려주는 정책은 중앙정부와 지방 유력자들의 타협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지방의 호족에게 성씨를 내려줌으로써 중앙정부가 그 호족을 국가에서 인정한다고 하는 것을 증명해줄 수 있는 거죠. 성씨를 받은 그 사람은 '나는 중앙정부로부터 성씨를 받았고, 나의 이 지방에서의 세력은 중앙정부가 인정한 것이다'라고 드러낼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 대신 성씨를 받은 지방 세력은 국가를 대신해서 지방민을 통제하고 통치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다시 얘기해서 국가는 지방 유력자에게 성씨를 줌으로써 그 사람들을 통해서 민을 지배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이죠. “본관 제라고 하는 것의 출발은 중앙정부가 전국의 민을 통치하고 지배할 수 있는 수단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