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국 고려 - 고려의 국제적 위상
황제국 고려라는 주제로 10세기부터 13세기까지 고려의 국제적 위상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10세기부터 13세기까지는 고려 전기에 해당하는 시기입니다. 이때는 고려를 둘러싼 동아시아에 다원적 국제질서가 형성됩니다. 이 다원적 국제질서 안에서 고려가 어떠한 위상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 주제가 되겠습니다. 먼저 강의를 진행하기 전에 핵심적인 키워드라고 할 수 있는 책봉과 조공 그리고 사대라고 하는 용어에 대해서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책봉이란 중국의 황제가 주변 국가의 지배자, 대체로 국왕들을 인정해주는 의례적인 절차를 말합니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중국 왕조의 책봉을 받았는데요. 그 사례를 보시면 이와 같습니다. 고구려 장수왕이 북위로부터 책봉을 받는 기사입니다. "(북위에서) 왕에게 벼슬을 내려 도독 요 해제 군사 정동 장군 영호 동위 중랑장 요동군 개국 공 고구려왕을 삼았다. " 이 기사는 중국의 북위가 고구려의 장수왕을 고구려왕에 책봉했다고 하는 내용이 되겠습니다. 다음 기사는 신라의 진흥왕이 중국의 북제로부터 책봉을 받은 기사입니다. "진흥왕 26년에 북제의 무성 황제가 조서를 내려서 왕을 사 지절 동위 교위 낙랑 군공 신라왕으로 삼았다. " 신라왕에 책봉했다는 내용입니다. 이렇게 중국의 황제가 고구려와 신라와 같은 주변 국가의 국왕들을 고구려왕 또는 신라왕으로 인정해주는 의례적 절차. 이것을 책봉이라고 합니다.
조공이란?
그렇다면 조공이란 무엇일까요? 조공은 책봉을 받은 국왕이 책봉에 대한 대가로 황제에게 예물을 보내는 행위입니다. 책봉이 먼저 이루어지고 그에 대한 대응으로서 조공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따라서 책봉과 조공은 서로 상응하는 관계에 있고 책봉과 조공을 교환하는 행위를'책봉-조공 관계'라고 부르게 되는 것이죠. 그렇다면 책봉을 하고 조공을 하는 이 두 국가 간의 관계는 과연 대등한 것일까요? 언뜻 보아서도 이 관계는 대등하지 않습니다. 책봉을 하는 나라와 책봉을 받고 조공을 하는 나라 사이에는 상하관계가 만들어지기 마련이죠. 책봉 조공 이런 행위로 국가 간의 관계를 설정하는 방식은 본래는 중국의 주나라 때, 아주 먼 옛날이 되겠습니다만 이때 중국 안에서 왕실과 주변 제후들 간의 관계로부터 유래합니다. 주나라 왕실이 주변 제후들을 책봉하고 제후들이 주나라 왕실에 대해서 조근 공헌하는 -조근이라고 하는 것은 제후가 직접 왕실을 찾아가는 것이고 공헌이라고 하는 것은 예물을 바치는 행위입니다. 여기서 시작해서 한나라 때 국제관계로 확장됩니다. 그때부터 중국 왕조와 주변 국가들 간에 국제관계, 외교관계를 설정하는 방식이 되는데요. 이때 중국의 황제가 주변국의 지배자를 무슨 왕 또는 무슨 후, 무슨 군, 무슨 장. 이런 식으로 책봉을 합니다. 책봉과 조공은 이런 의미에서 '중국과 소국들 간의 쌍무적인 상하관계' 이렇게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 맹자가 책봉과 조공의 쌍무적인 관계에 대해서 설명해놓은 것이 있습니다. '맹자'라고 하는 책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제나라 선왕이 맹자에게 "이웃 나라와 사귀는 데 도가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이에 대해서 맹자가 대답하기를 "있습니다. 오직 인자, 어진 자라야 큰 나라로써 작은 나라를 섬길 줄 알고 오직 지자, 지혜로운 자라야 작은 나라로써 큰 나라를 섬길 줄 아니 큰 나라로써 작은 나라를 섬기는 것은 천명을 즐기는 것이요 작은 나라로써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천명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천명을 즐기는 자는 천하를 보전하고 천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그 나라를 보전합니다. "라고 하였다. ' 여기서 작은 나라로써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을 '이소사대(以小事大)'라고 하고 이 구절로부터 사대라는 말이 나오게 됩니다. 사대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 이런 의미를 갖는데요. 따라서 책봉-조공 관계에서 책봉을 받고 조공을 하는 작은 나라의 행위를 사대라고 부르는 것이죠. 우리가 요즘 흔히 쓰는 사대, 사대주의 이런 말들의 어원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사대가 작은 나라의 일방적인 의무가 아니라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공격하지 않고 그 존재를 인정했을 때 그에 대한 대가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데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조공과 책봉의 의미
'큰 나라는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복수의 작은 나라들을- 인정함으로써 자기가 중심이 되는 천하 질서를 유지할 수 있었다'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작은 나라들을 인정해서 자기중심의 천하 질서를 유지할 수 있었던 큰 나라가 갖게 되는 이익과 큰 나라에 사대함으로써 국가를 유지할 수 있게 된 작은 나라들이 갖게 될 이익 가운데 어느 것이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 그것은 그 크기를 비교할 수 없는, 따라서 큰 나라와 작은 나라가 서로의 이익을 추구한 상호보완적인 관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형식적으로는 분명한 상하관계이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큰 나라와 작은 나라들이 서로의 이익을 보장받을 수 있는 그런 의미에서 안정적인 국제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수단이 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죠. 이 관계는 전근대, 그러니까 19세기에 새로운 국제질서가 만들어지기 이전까지 동아시아의 보편적인 국제질서로 존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서기 343년에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전연으로부터 책봉을 받은 이후 대대로, 실은 조선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책봉-조공 관계에서 벗어날 때까지 1500년 이상을 책봉-조공관계의 틀 안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이 표는 한국 역사 속의 책봉과 조공 사례를 앞 시기 것만을 정리해놓은 것입니다.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전연으로부터 백제의 근초고왕이 동진으로부터 그리고 신라의 진흥왕이 북제로부터 책봉을 받아서 삼국이 차례로 중국 왕조의 책봉을 받았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다음에 신문왕이 당으로부터 그리고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한 다음에 당으로부터 책봉을 받았습니다. 후삼국 시기에는 후백제와 고려가 책봉을 받기 위해서 서로 경쟁을 하기까지 합니다. 그 결과 후백제의 견훤은 후당으로부터 (검교태위 겸 시중) '판 백제군사'라고 하는 이름의 책봉을 받습니다. 반면 고려 태조는 같은 후당으로부터 (특진 검 교태보) '고려 국왕'에 책봉을 받습니다. 후백제는 백제 국왕이 아니라 판 백제군사로 책봉을 받고 왕건은 고려 국왕에 책봉을 받습니다. 이것은 책봉을 둘러싼 외교전에서 왕건의 고려가 견훤의 후백제에 승리를 거두었다고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이후 고려, 조선이 500년, 또 500년 모두 1000년 동안 중국 왕실의 책봉을 거의 빠짐없이 받게 됩니다. 동아시아에 여러 나라가 있었지만 책봉-조공 관계에 가장 철저했던 것이 바로 우리였습니다. 우리는 삼국 이후 고려,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책봉-조공을 거의 거르지 않았고 동시에 책봉-조공 관계 이외의 형식으로 중국 왕조와 관계를 맺은 적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서양과 미국 학계에서는 한국을 '전형적인 조공국'이라고 표현하기까지 합니다. 책봉과 조공, 이 관계를 교환하는 것을 사대관계라고 한다고 설명했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한국 대외관계에서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바로 책봉-조공 관계에 있었다. 이 관계는 대등한 관계는 아니었다. 하지만 책봉을 하는 나라와 책봉을 받는 다수의 국가들이 서로의 이익을 교환하는 관계였다. 이것을 이해하면서 구체적으로 고려가 중국의 왕조와 어떤 관계를 맺으면서 동아시아에서 국제적인 지위를 확보해 나갔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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