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유교가 공존한 고려
고려는 어떤 나라인가 고려의 3번째 이미지 '불교와 유교가 공존하는 나라'입니다. 불교와 유교는 참 다른 종교이고 사상입니다. 따라서 이 두 개가 공존하기가 쉽지 않은데요. 우리가 익숙한 우리에게 익숙한 억불숭유라고 하는 것이 이 불교와 유교가 얼마나 공존하기 어려운 지를 보여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려시대에는 이 두 개의 종교 사상이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먼저 고려는 불교 국가였습니다. 고려 인구가 몇 명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아마 1000만 명은 조금 안 됐을 것입니다. 이 1000만 명이 안 되는 그 사람들이 위로는 국왕부터 아래로는 아주 밑바닥에 천민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부처님을 믿는 그런 나라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불교를 믿으면서 공덕 신앙이라고 하는 것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공덕 신앙은 내가 덕을 쌓으면 보답을 받게 된다고 하는 그런 믿음입니다. 아마 고려 사람들은 모두 덕을 쌓기 위해서 착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공덕 신앙의 보답이라고 하는 것은 현세에 내가 살아있을 때 받는 것이 아니라 윤회를 통해서 다음 생에서 받는다고 하는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현세에 내가 복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이런 생각을 하기가 어려웠을 텐데요. 그런 생각은 관세음 신앙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충이 됩니다. 관세음보살을 믿으면 내가 죽기 전에도 살아있을 때 복을 받게 된다고 하는 생각입니다. 공덕 신앙과 관세음 신앙 이 두 가지 신앙을 가지고 고려 사람들은 덕을 쌓고 부처님의 어떤 복을 바라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불교를 믿는 이런 불교 국가는 고려가 건국될 때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합니다.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은 후대 왕들에게 남긴 훈요 10조의 첫 번째 조항에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우리나라의 대업은 반드시 모든 부처가 보호하고 지켜주는 힘에 의지한 것이다. 그러므로 선종과 교종의 사찰을 창건하고 주지를 파견하여 분향하고 수도하게 함으로써 각각 자신의 직책을 다하도록 하였다. 후세에 간신이 정권을 잡고 승려의 청탁을 받아 각자의 사찰을 경영하며 서로 싸우며 바꾸고 빼앗는 일을 결단코 금지해야 한다. 첫머리에 우리나라의 대업은 고려의 대업은 반드시 모든 부처가 보호하고 지켜주는 힘에 의지하는 것이다라고 말을 합니다. 고려의 건국과 후삼국 통일이 부처님의 가호에 의해서 가능했던 일이다라고 후손들에게 선언을 한 것이죠. 이것에 따라서 고려 왕실은 전국의 사원과 승려들에게 정책적인 지원을 하게 됩니다. 전국의 사찰에 토지를 지급하고 또 노비를 지급하고 사원이 소유하고 있는 토지로부터는 세금을 받지 않았습니다. 중세 유럽의 영주들이 가지고 있었던 면세, 면역의 특권이 고려시대 사원에 주어졌던 것이죠.
승과 제도
국가에서는 승과라고 하는 과거 제도를 실시했습니다. 승과는 승려가 되기 위한 과거시험인데요. 우리나라 역사에서 유일하게 고려시대에만 존재했던 시험입니다. 승려들이 승과를 통해서 승직에 오르고, 승직에 오른 승려들은 승진을 합니다. 그래서 가장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되면 국사, 왕사가 되는데 국사, 왕사는 왕이 이 사람들을 만날 때 먼저 절을 할 정도로 왕이 존경을 표합니다. 그리고 단순한 종교 지도자일 뿐 아니라 정치에 대한 자문까지도 하는 어떤 정치적으로도 실력자가 되는 것이죠. 그리고 연등회, 팔관회 같은 불교 행사를 국가적인 규모로 시행을 합니다. 요즘도 초파일에는 연등을 걸어놓고 하는 불교 행사가 있는데요. 이것이 고려시대 연등회에 후신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밖에 명산, 대천 그리고 부처님에게 기도하는 팔관회라고 하는 아주 거대한 규모의 국가적인 행사가 거행이 됩니다. 불교계는 국가로부터 정책적인 지원을 받는 대신에 국가를 위해서 봉사를 하게 됩니다. 국가의 평안을 기도하는 불교 행사 인왕 도량이라고 한 것을 열게 되는데요. 수천 명의 승려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인왕 경이라고 하는 불경을 함께 읽는 그런 행사입니다. 인왕 경은 부처님의 도움으로 국가를 평안하게 안전하게 지킬 수 있다고 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불교 경전입니다. 여기에서 고려 불교의 호국 불교의 성격이 드러나죠. 실제로 고려는 외침을 받았을 때 부처님의 도움으로 이 국난을 극복할 수 있다고 하는 생각에서 대장경을 만든 적이 있습니다. 지금 남아있는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은 유명하죠.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은 고려 후기의 몽골의 침략을 받았을 때 몽골군을 물리치기 위해서 만든 대장경입니다. 이것 말고도 고려 초에 거란군의 침략을 받았을 때에도 부처님의 도움으로 거란군을 몰아내기 위해서 대장경을 만든 적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처음 만든 대장경이란 의미에서 초조대장경이라고 하고 몽골 침략 때 만든 대장경을 재조대장경이라고 하는데요. 고려시대에는 두 번이나 대장경을 만들어서 국난을 극복하고자 했습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이 불교 신자이고, 국가가 정책적으로 불교를 지원하고, 불교는 국가를 위해서 봉사하는 이런 의미에서 고려는 틀림없는 불교 국가였습니다. 이 불교 국가 고려에서 불교 사상이 발전을 하게 되는데요. 고려가 들어서기 전에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의 불교는 모두가 교종 불교였습니다. 교종 불교라고 하는 것은 불교 경전을 연구해서 불교 교리를 이해하려고 하는 불교입니다. 신라 말에 역시 중국에서 선종 불교가 새로 들어오게 되는데요. 선종 불교는 불교 교리를 이해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기 스스로 깨달음을 얻고 부처가 되려고 하는 불교입니다. 기존의 교종에 선정 불교가 새로 들어오면서 고려시대의 불교 사상의 과제는 교종과 선종을 어떻게 통합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있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고려 전기의 대각국사 의천이 천태종이라고 하는 종단을 창립했고, 고려 후기에는 보조국사 지눌이 조계종이라고 하는 종단을 창립했습니다. 의천은 교관겸수라고 해서 교와 관을 겸해서 수행한다 이런 교리를 만들었고 지눌은 정혜쌍수라고 해서 정과 혜를 고루 닦는다 이런 주장을 했습니다. 모두가 교종과 선종을 함께 수행한다고 하는 의미를 갖는데요. 이런 노력을 통해서 한국 불교의 전통이 교종 일변도, 선종 일변도로 가지를 않고 교종과 선종을 통합하는 상태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 대각국사 의천과 보조국사 지눌의 영정이 남아 있어서 두 분의 모습을 아주 친근하게 알아볼 수가 있습니다.
유교의 발전
한편에서 불교가 발전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유교가 발전합니다. 유교는 삼국시대 특히 통일신라시대에 발전을 하는데요. 이것이 정치사상으로 활용되는 것은 고려시대부터입니다. 고려를 건국한 왕건은 이미 그 시대의 유학자들로부터 유교 경전에 대한 학습을 하는 것으로 유교 경전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자 역시 훈요 10조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임금이 신민의 마음을 얻는 것은 매우 어려우니, 그들의 마음을 얻으려면 중요한 것은 간언을 따르고 참소를 멀리하는 것에 있을 뿐이다. 간언을 따르면 성스러워질 것이고, 참소는 꿀과 같으나 믿지 않으면 곧 스스로 그친다. 또 백성들이 때를 따라 일을 하고 요역과 부세를 가볍게 하며 농사일에 어려움을 알아주면, 저절로 백성의 마음을 얻게 되어 나라는 부강하고 백성은 편안해질 것이다. 상벌이 공정하면 음양도 순조로워질 것이다. 국왕이 좋은 정치를 해서 백성들의 마음을 얻어야 된다고 하는 이 생각은 유교에서 나온 것입니다. 왕건은 일찍부터 유교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고 이것을 바탕으로 경쟁자였던 궁예나 견훤에 비해서 우위를 가질 수 있었던 것으로 평가가 됩니다. 실제로 왕건은 왕이 된 다음에 취민유도, 의용십일 이런 말을 하는데요. 취민유도라고 하는 것은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거둘 때 법에 따라 거둬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법이 구체적으로는 의용십일, 십 분의 일을 거두는 제도를 써야 한다 이렇게 표현이 되는 것인데요. 이렇게 백성들로부터 함부로 거두지 않고, 백성들이 살 수 있는, 그런 바탕에서 국용을 채워야 된다고 하는 이런 생각도 역시 유교에서 비롯된 것이죠. 이것을 요즘은 위민 정치, 백성을 위한 정치라고 평가를 합니다만 유교에서 연장될, 유교로부터 나온 생각입니다. 광종 때 과거 제도를 실시한 것이 유명한 사실이죠. 과거 제도는 시험을 보아서 관리를 선발하는 제도인데요. 이 시험은 유교 경전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후에 고려에서 관리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은 모두 유교 경전을 공부를 해야 됐겠죠. 그리고 성종 대에 최승로의 시무 28조라고 하는 아주 유명한 건의가 있게 되는데 최승로는 당대 아주 유명한 유학자였고 시무 28조는 모두 유교 정치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고려는 국자감이라고 하는 교육기관을 만들어서 유교를 교육시켰고, 11세기부터는 최충의 구제 학당을 비롯한 사립학교들이 만들어지는데 이 학교들도 모두 유교 경전을 교육합니다. 유교 경전을 교육하고 그렇게 해서 공부한 사람들이 과거를 통해서 관리가 되고 이 사람들은 모두 유교 정치 이념을 공유한 상태에서 국가를 경영하게 되었던 것이죠. 한편에서는 불교가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유교가 자기의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인데요. 이런 상황에서 불교와 유교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하는 과제가 생겼을 것입니다. 이 문제를 고려 사람들은 공존이라고 하는 것으로 해결을 했습니다. 최승로의 시무 28조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불교를 믿는 것은 수신의 근본이고 유교를 행하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근원입니다. 잘 살펴보면 불교는 수신, 자기 개인의 수양을 위한 것이고 유교는 이국, 나라를 다스리는데 필요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종교로서의 불교와 정치사상으로서의 유교를 구분하고 있죠. 이렇게 역할이 구분되다 보니까 불교와 유교가 서로 대립, 충돌하지 않고 공존할 수 있게 됩니다. 이래서 고려 시대에는 불교와 유교가 공존한 상태로 수백 년이 유지가 되는데요. 고려 후기의 상황이 달라집니다. 고려 후기에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이 성리학은 유학의 한 분배지만, 불교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이단인 불교를 배척해야 된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이때부터 억불숭유라고 하는 말이 나오게 되는 것인데요. 성리학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이후에 조선을 건국하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불교와 유교가 공존하지 못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불교와 유교가 공존한 유일한 나라가 고려가 되었던 셈이죠. 이런 점에서 고려에 3번째 이미지, 불교 유교가 공존한 나라 불교에 역사적인 특징을 보여주는 이미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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